경제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고, 충돌을 회피해서는 미국을 '치유'할 수 없다.
그녀는 "반가워, 나도 페미니스트야"라고 말했다
작품명 - 어디냐고 여쭤보면 ‘청와대교’
'대선후보 블라인드 테스트'는 사용자가 대선 후보들의 발언을 무작위로 보게 돼요. 대선 후보 이름은 볼 수 없어요. 발언 자체를 놓고 개인 가치관에 맞게 호감이 가는 발언을 선택하는 거죠. 그럼 결과를 통해 후보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어요. 이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후보가 내 가치관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란 걸 알 수도 있고, 내가 싫어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한 평가와 설득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지금껏 역대 선거에서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정책안과 미래비전을 내세우지 않은 후보나 정당은 없었다. 하지만 한두 번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번번이 립 서비스로 끝났다. 후보와 정당의 진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빌려온 것이었고, 당선 이후 오리발을 내밀었다. 진보당에서 한겨레당, 민중당, 국민승리21로 이어지는 범진보 혁신정당에서 애써 기획하고 정리한 내용을 베껴서 변조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까운 예로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의 담론이 그렇다.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대통령선거만을 놓고 보자. 2002년 제16대 선거를 제외하고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더 좋은 후보'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는가? 이 땅의 선거권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덜 나쁜 후보'를 골라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유력정당이나 후보들 가운데 진정으로 서민의 삶을 향상시킬 의지와 능력, 그리고 국가사회를 바로세우고 민족역사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품성을 지니고 비전을 펼쳐낸 경우가 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매번 선거 때마다 검증된 실체도 제대로 된 레퍼런스도 없는 '20대 개새끼론'이나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젊은 세대가 투표하러 가서 야당에 몰표를 줄 거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성장환경, 학력, 지역, 소득 등 다양한 변인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균질하게 묶인다는 착각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지금의 젊은 세대는 최근의 어느 때보다 보수화 경향이 뚜렷하고, 이 모두를 떠나서 20-30대도 본인의 정치의식이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여당을 지지할 수 있지 않은가.
이명박 정부 이래 수구·보수 세력이 87년 이후 민주화 성과를 파괴해온 상황을 생각해보라. 남북관계와 외교는 엉망이고, 국가기구에서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서 탈민주화가 진행되었다. 남아 있는 민주화 성과는 선거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상황을 요약하면, 기득권을 모두 챙긴 수구·보수 세력은 선거에만 이기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돈도 권력도 없는 다수 대중은 선거에 지면 모든 것을 잃는 형국이다.
승자들은 하늘이 감동할 만큼 노력하라고 요구합니다. 보수적인 언론과 정치인들은 구조적 문제점에 눈을 감고, 개인의 노오력으로 해결할 것을 주문합니다. 진보 인사들은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낮은 투표율을 꾸짖고, 적극적 참여를 요청합니다.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고, 분노할 것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진보조차 구조적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N포세대로 상징되는 결핍 상황은 우리의 인지 능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분노할 수 있는 능력까지 빼앗고 있습니다. 노력 부족을 탓하는 것만큼,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타박이 허망할 수 있습니다.
요즘 <송곳>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그날의 토론을 떠올린다. 드라마 <미생>을 볼 때도 그랬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은 비판할 수 있지만, 사장은 비판할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노예적' 삶을 살고 있다. 고용주는 생사여탈권을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갖 굴욕을 감수한다. 이것이 <송곳>과 <미생>이 폭로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기록인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물이 앞을 가려 끝까지 보기가 참 힘들었다. "부조리하고 내 이익만 챙기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을 내 이익만 챙기지 않는 아이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앞으로도 오래 살려구요.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기억해줘야죠.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 잊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 벌써 잊은 사람도 있을 텐데...."
혹자는 정책검증을 해야 선진정치라는 볼멘 소리를 해대지만, 선진국 정치인의 검증이 정책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는 도덕적으로 문제될 만한 사람들은 애초에 후보군에서 제외되는 것이 상식화됐기 때문이다. 최근에 있었던 현직 총리와 야당 당수의 TV 토론도 흥미롭다. 질문자는 송곳 질문으로 유명한 방송앵커 제러미 팩스만이었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답변을 안 하고 있다." 한 인터뷰어에게 열두 차례나 같은 질문을 한 전력이 있던 그가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한국의 지난 총리청문회(인터뷰가 아니다)와의 대비가 단계 단계마다 너무도 극명해서 차라리 허망해진다. 당시 한국 언론은 후보자의 자질을 파헤치는 당사자라기보다는 청문회 통과여부를 점치는 관전자 내지 해설자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 내 기억이다.